엄마는 조금 드센 성향의 사람이다. 그렇다고 되나 가나 치 받는 성격은 아니다. 본인의 관점에서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가만히 있지 않는 성격이다. 그런 엄마도 아들에겐 한없이 약한 모습을 보인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맹목적이라는데, 엄마가 딱 그런 경우다.
짝사랑보다 위험한 맹목적인 사랑을 아들에게 한없이 보내는 그런 엄마다. 짝사랑은 나름 사리분별을 하는 사랑이다. 일정 선을 넘어서지 못하는 사랑이니. 그에 반해 맹목적인 사랑은 사리분별 따위는 없다. 말 그대로 일편단심이다. 그럼에도 엄마는 아들을 품에만 안아 키우지는 않았다. 그래서인지 감사하게도 아들은 ‘마마보이’가 되진 않았다. 그런 엄마의 아들인 나는 ‘윤형석’이다.
아내는 밝은 사람이다. 남편이 가지고 있는 옅은 어두움 같은 게 없는 사람이다. 남편의 어두움은 세상에 대한 냉소로 표현되는 데 그런 게 전혀 없는 사람이다. 말 그대로 그냥 밝은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다소 어두움을, 냉소를 가지고 있는 남편을 어찌 만났고 결혼까지 하게 됐는지 의아할 정도다.
남편은 전에 장난 삼아 본 사주에서 ‘얼어붙은 땅’이란 표현을 들었던 적이 있다. 그런 사주를 가진 남편을 밝음으로 따뜻하게 녹여 주고, 감싸 주러 온 포근한 모닥불 같은 사람이다. 이런 게 인연인가 싶은 생각도 해 본다. 그런 아내의 남편인 나는 ‘윤형석’이다.
동생은 생활력이 강한 사람이다. 오빠보다 배움이 짧았음에도 삶을 살아가는 용기는 두 배, 세 배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카페를 한 번 해 보고 싶은데, 용기가 나질 않아 단 한 번도 도전해 본 적이 없는 오빠에 비해, 동생은 벌써 네 번째 카페를 운영 중이다. 조선 시대의 만년 서생인 남편과 그런 남편을 뒷바라지하는 억척스러운 아내 같은 모습이 떠오를 정도다.
알게 모르게 오빠를 참 많이 도와주는 동생이다. 같이 크는 동안에 장남이라고 꼴값 떠는 오빠에게 많은 걸 양보한 동생인데, 성인이 돼서도 툴툴 거리며 아닌 척 하지만, 오빠를 참 많이 도와주는 동생이다. 그런 동생의 오빠인 나는 ‘윤형석’이다.
딸은 너무 사랑스럽고, 귀엽고, 기특하다. 다른 무엇보다도 건강하게 태어나서 잘 자라주고 있는 모습이 기특하면서 감사할 따름이다. 밝은 엄마에 비하면 별로 밝지도 않은 아빠를 보고, 참 잘도 웃어 주는 딸이다. 중저음의 아빠 목소리에 깜짝깜짝 놀라 많이 울기도 하지만, 돌아서면 언제 그랬냐 싶게 밝게 웃어 주는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운 딸이다.
아빠가 남은 삶, 글을 쓰면서 살아 보겠다는 도전에 용기를 준 딸이다. 한 때 결혼조차 포기했던 아빠의 삶에 선물 같이 찾아온 딸이니 그 소중함을 말해 무엇하랴. 엄마가 녹여 준 얼어붙은 땅을 비춰 주는 따사로운 햇볕과 같은 딸이다. 그런 딸의 아빠인 나는 ‘윤형석’이다.
죽마고우들이 있다. 정말 대나무 말을 같이 타고 놀지는 않았지만, 고등 시절부터 20여 년이 넘는 우정을 이어 오는 친구들이다. 한 녀석은 만두, 또 한 녀석은 범버, 마지막 한 녀석은 끄딩이다. 참고로 그들의 친구인 또 다른 한 녀석의 별명은 ‘때가리’다. 20년 넘게 만났는데, 어떤 녀석들인지 잘 모르겠다. 하기야 가족들 성격도 겨우 파악했는데, 친구들 성격이야 뭐 대충 넘어가도 될 문제 같다. 그만큼 격의 없이 만나는 녀석들이다.
다들 성인이 돼 바쁘게 살아가면서 일 년에 한 두어 번 만나기도 힘들지만 만나는 순간, 만나는 기간이 무색할 정도로 아무렇지 않게 시답지 않은 농담을 주고받는다. 네 녀석들의 공통점이 딱 하나 있다. 고집불통이라는 점이다. 자석도 같은 극끼리는 밀어내는 법인데, 이 녀석들은 둔한 건지, 바보 같은 건지 오히려 들러붙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누가 더 고집이 쌘 지 증명하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런 친구들의 친구인 나는 ‘윤형석’이다.
나 ‘윤형석’은 많은 사람들 속에 따로 또 같이 살아가고 있다. 내가 의도한 모습도 있고, 그렇지 않은 모습도 있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말을 하고 행동을 했는데, 사람들은 저렇게 받아들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역시 나라는 사람의 모습일 것이다. 부정할 수도 없고, 부정해서도 안 되는 나의 모습이다.
사람을 어찌 하나의 모습, 성향으로만 설명할 수 있을까? 내가 나를 잘 모르고, 정의 내리기 조차 힘든데, 사람들이 나를 정확히 이해해주길 바라는 것 자체가 욕심이다. 우리는 은연중에 사람들에게 진정한 나의 모습보다 내가 바라는 모습으로 비치길 기대하는 경향이 있다.
내가 아무리 나는 A라는 성향의 사람이라고 행동과 말을 해도, 사람들이 B라고 받아들인다면 내가 나를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내가 나를 표현하는 방법이 서툴러 의도와 다른 모습으로 이해될 수도 있으나, 그보다는 착각하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거기에 더해서 좋은 사람, 괜찮은 사람, 착한 사람, 적극적인 사람과 같은 긍정적인 모습으로만 보여 지길 바라기도 한다. 사람이 살다 보면 상황에 의해 의도치 않게 나쁜 모습을 보일 수도 있고, 조금 이상한 모습을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한 모습 역시 분명히 나란 사람의 일부임에 분명할 텐데, 대다수의 사람들은 상대적일 수 있는 부정적인 모습조차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리고 그런 부분을 억지로 가리려 하니 부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이며 의도한 바와 다르게 오히려 이상해 보이는 경우도 있고, 실수를 하는 경우도 많다.
나를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 있는 용기를 갖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가족과 지인들 삶 속에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 된다. 어떤 사람은 나를 매정한 사람으로 기억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나를 무뚝뚝한 사람으로 바라볼 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내가 많이 부족해 보일 수도 있고, 그리고 어떤 사람은 나를 이상하게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회적 관계라는 관점에서 부정적인 모습일 뿐이지, 개인 입장에서 본다면 그렇게 규정지어진 모든 모습이 그 개인을 이루고 있는 구성요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 몸을 구성하는 원소들의 비율을 보자면 산소가 65%, 탄소가 18%, 수소가 10%, 질소가 3%, 칼슘이 1.9%, 인이 1%, 칼륨이 0.35%, 황이 0.25%, 나트륨이 0.15%, 그 외에 미량의 염소, 마그네슘, 알루미늄, 실리콘, 철, 코발트, 아연, 아이오딘, 셀레늄, 불소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다른 원소는 낯설어 잘 모르겠고, 칼슘을 보자. 칼슘의 주요 기능은 우리 몸의 뼈를 구성하는 것이다. 그런데 구성 원소 상의 비율로 보면 고작 1.9% 일뿐이다. 아주 미미한 비율일 뿐이지만, 뼈를 이루는 주요 원소라는 점에서 절대적으로 있어야 하는 원소다. 즉, 내가 가지고 있는 성향 중에 미미하거나 감추고 싶은 성향일지라도 나란 사람을 설명하는 데 있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내가 바라고 생각하는 나의 모습과 많은 사람들 속에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 숨 쉬고 있는 내 모습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이 세상은 보다 다채로워지고 재미있는 세상이 될 것이다. 다채로운 세상 속에 다채로운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나는 ‘윤형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