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가난하게 살았어. 2

반응형

 가난했는데 더 가난해졌다. 기울 가세도 없는데 그게 또 기우는 마법을 부렸다. 마른오징어도 짜면 물이 나온다고 했던가? 이미 바닥이었는데 바닥 밑에 지하가 있음을 실감했다. 초등 2학년 말 이사를 갔다. 더 작은 집으로. 살던 곳도 단칸방이었는데 더 작은 단칸방으로 이사를 갔다. 어렸음에도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이쯤에서 아빠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간략하게. 배움에 목말랐지만 배움이 짧았던 사람이다. 아빠 역시 가난한 집안의 아들이었다. 요즘 같으면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볼 법한 이야기, 돈이 없어 공부를 못 했다. 지금이야 대학교 졸업이 별스러울 것도 없는 시대지만 아빠 세대는 고등학교 졸업조차 못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내가 꽤 성장할 때까지 아빠가 고졸인 줄 알았다. 물어보면 아빠가 늘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고등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했다고 한다. 고등학교 졸업도 못 했다고 하면 창피하니 그냥 그렇게 말하고 다닌다고 했다. 누구나 다 대학에 가는 시대의 내가 이해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었지만 사실이 그랬다.    

 

 

 그럼에도 아빠는 아빠로서 우리 가족을 건사했다. 세상에 나와 보면 가방끈이 짧아도 먹고살 길은 있다. 아빠는 평생 운전을 했다. 서울에 가서 택시도 하고, 연탄 집 사장으로서 연탄도 직접 트럭을 몰아 배달했다. 연탄 집을 할 때는 꽤 잘 되 직원도 한 명 썼는데, 너무 바빠서 직원이 연탄 배달 트럭에서 피곤해 졸다가 문이 열려 트럭 밖으로 떨어진 적도 있다고 했다. 다행히 트럭은 주차 중이어서 큰일은 없었다고 했다. 그리고 시내버스를 하다가 관광버스로 바꿨다. 시내버스는 늘 같은 구간만 다니니 재미없다고 관광버스를 한다고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관광버스가 문제였다. 관광버스를 하면서 아빠는 아빠로서 책임감을 버렸다. 관광버스를 한 다는 것. 다시 말해 관광버스 기사를 한다는 것은 성수기가 있는 일을 한다는 것이다. 비성수기엔 딱히 할 일이 없다. 물론 통근버스로 활용되는 경우도 있지만 관광버스의 본래 목적인 관광보다 돈이 되질 않는다.     

 

 

 그렇지 않은 기사 분들이 더 많겠지만, 무료한 비성수기를 은근히 많은 기사 분들이 삼삼오오 모여 재미 삼아 고스톱을 치면서 시간을 보냈다. 아빠는 후자였다. 그리고 재미를 넘어 과하게 빠져 들었다. 노름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결과는 뻔했다. 있지도 않은 재산, 그나마도 다 들어 먹었다. 엄마는 노름빚 갚느라 정신이 없었다. 세상 아깝고 황당한 돈이 노름빚이다. 사업을 하다 빚을 졌으면 무언 가 생산적인 일을 하다 빚을 진 거니 그래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그런데 노름빚이라니…. 어이가 없고, 억장이 무너지는 돈이다.    

 

 한 때는 비싼 관광버스를 전세로 끌지 않고 직접 사기까지 했던 아빠는, 차도 팔아먹고 전세금도 들어먹고도 부족해 빚을 져 노름을 했다. 그런 아빠도 남편이라고 엄마는 노름빚을 갚기 위해 또 다른 빚을 져가며 삶을 이어 갔다. 나는 아직 어렸기에 그런 아빠의 모습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빠에게 하고 싶은 말은 있었지만 할 깜냥이 안 됐다. 어리기도 했고, 지금 생각해 보면 이해가 안 가지만 그 상황이 직접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던 것 같다. 분명히 아빠가 노름하는 모습을 지겹게 봤고, 엄마가 노름빚을 갚으러 다니는 것 역시 지겹게 봤다. 그럼에도 먹고 잘 수 있는 집이 있었다. 우리 집은 아니었지만, 그나마도 점점 작은 단칸방으로 줄어들었지만 잘 수 있는 집이 있었기에 그냥 그랬다.     

 

 

 그 상황이 피상적으로만 다가왔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피상적인 상황이 본질적으로 다가왔다. 아빠, 엄마, 동생 그리고 나까지 네 가족이 다 모여 저녁을 먹은 뒤에 늘 그렇듯이 엄마와 아빠는 노름으로 싸우고 있었다. 많이 봐 왔던 장면이기에 동생과 나는 옆에서 조용히 의미 없는 눈길을 TV에 두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엄마가 “이렇게 살 거면 다 죽자.”면서 부엌으로 나가 연탄불을 빼 와 방바닥에 내려놓았다. 다 같이 연탄가스 마시고 죽자는 것이었다. 오래전 일이라 그때의 감정이 어땠는지 기억이 잘 나질 않는다. 30여 년 전 일이다. 충격을 먹은 것 같기도 했다. 울었던 것 같기도 하고, 생각해 보면 아니 이렇다 할 느낌이 없는 거 보니 담담했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뇌리에 남아 있는 사건인 걸 보면 분명히 강렬한 사건이었으리라. 기억에 의하면 아빠가 알았다고 그만 한다고 미안하다고 이러지 말자며 연탄불을 다시 부엌에 있는 연탄보일러에 넣어 두었던 것 같다. 그랬을 것이다. 그리고 그날 밤, 우리 가족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잠을 잤다. 단칸방이니 당연히 네 가족이 조르륵 일렬로 누워 잤다. 내가 바로 잠이 들었는지 충격에 겨워 밤잠을 설쳤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늘 싸우는 엄마, 아빠의 모습 중에 상당히 충격적인 모습이었던 것만큼은 확실하다. 더불어 엄마는 홧김에 그런 행동을 한 것도 확실하다. 나와 내 동생을 너무 사랑했기에 진짜 다 같이 죽자고 그러진 않았을 것이다. 다만 노름에 허덕이는 아빠에게 충격요법을 쓴 것이리라.     

 

 

 그러면서 문득 섬뜩한 생각이 든다. 이렇게 정말 죽는 가족들도 있겠구나. 그런 가족까지는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되는 건지, 그런 가족의 안쓰러운 상황을 공감해야 되는 건지 잘 모르겠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