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버려진 소녀의 여정

반응형

 5월의 여왕, 장미에게서 난 소녀가 있었다. 여왕에게서 난 소녀는 응당 공주라 불려야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장미는 한 해에 한 명의 소녀만 공주로 틔워야 하는 데 무슨 일인지 올해는 두 명이 나왔다. 소녀보다 조금 일찍 나온 또 다른 소녀가 공주로 불렸고, 소녀는 여왕에게 매몰차게 버려졌다.      

 

 자연의 섭리대로 살아가는 그들이기에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었다. 일 년에 한 명의 공주만 인정하는 것, 이것이 바로 자연의 섭리였다. 이제 막 벼려낸 칼날만큼 날카롭고, 겨울 서리만큼 차가운 섭리이기에 소녀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소녀가 선택할 수 있는 건 두 가지다. 땅으로 돌아가든지, 장미 밭을 떠나든지 둘 중에 하나다.      

 

 땅으로 돌아가자니 하늘이 너무 맑고 예뻐 그러기 싫었고, 장미 밭을 떠나자니 새의 먹이가 될 수도 있고, 사람에게 밟힐 수도 있는 일이기에 선뜻 용기가 나질 않았다. 그럼에도 너무 맑고 예쁜 하늘에 홀려 용기를 내 보기로 했다. 떠나는 길엔 누구의 배웅도 없었다. 공주가 되지 못한 버려진 소녀는 이미 장미 밭의 관심 밖이기 때문이다. 떠나는 몸은 홀가분했다. 이슬 정도만 먹어도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이기에 가는 길에 다른 꽃밭과 잡초만 무성한 들판만 있어도 먹고 살 걱정은 없었다.     

 

 떠나는 길에 소녀는 한 가지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를 기억해냈다. 장미 밭을 떠나 현자들을 만나 지혜를 얻어 다른 장미 밭을 일궈 낸다면 여왕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너무 오래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였다. 말 그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잠자기 전에나 들을 법한 그런 이야기였다. 하지만 소녀는 결심했다. 어디든 떠나야 했고 맑은 하늘을 보고 있자니 없던 용기가 막 솟아올랐다.     

 

 이야기의 조각들을 맞춰 가며 첫 번째로 찾아간 곳은 음습하면서 낮은 곳에 사는 자인 두꺼비가 있는 축축한 밭이었다. 두꺼비는 소녀를 보자마자 왜 왔는지 알겠다는 듯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찾아온 이유는?”

“또 다른 장미 밭을 일구려 합니다.”

“네 주제에?”

“네, 아직은 부족하지만 가르침을 부탁드립니다.”

“그럼 묻겠다. 음습하며 낮은 곳인 이곳에 사는 나에게 배울 것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네, 두꺼비님의 다리에 대해서 배우고 싶습니다.”

“제법이구나.”

“내 다리가 상징하는 바는 꾸준함이다. 사는 곳은 이렇지만 내가 원한다면 준비된 다리로 언제든지 뛰어올라 보다 높은 곳으로 갈 수 있다. 그런 꾸준함을 잊지 않는다면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두 번째로 찾아간 곳은 꾸준함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부지런한 쥐가 있는 보리밭이었다. 그런데 쥐는 소녀를 본체만체하며 자기 할 일에 여념이 없었다. 이렇다 할 연락도 없이 갑자기 찾아온 소녀는 쥐가 하는 일을 끝낼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쥐가 하는 일은 인간들이 추수하고 남은 보리 낱알을 모으는 것이었다. 낱알이라곤 하지만 그 밭의 넓이가 넓어 낱알의 수도 어마어마했다. 쥐는 정말 성실하게 그리고 무엇보다도 꾸준하게 넓은 밭 구석구석을 뒤졌다. 그리고 낱알 하나하나 빠지지 않고 모으고 있었다. 두꺼비가 말한 꾸준함이 저런 것인가 싶어 걱정이 되기도 했다. 과연 저런 꾸준함을 유지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었다.

 

 그런데 그때, 쥐를 노리는 뱀의 모습이 보였다. 소녀는 너무 놀란 나머지 숨소리도 낼 수 없었다. 설령 소리를 낸다 한들 정신없이 낱알을 줍는 쥐는 듣지 못할 것 같았다. 뱀은 슬금슬금 다가가 이제 막 또 하나의 낱알을 주우려 하는 쥐를 통째로 삼켜 버렸다. 유유히 사라지는 뱀을 보며 ‘나무 하나만 보는 꾸준함은 숲이 타는 걸 모를 수도 있겠구나. 넓은 시야를 바탕으로 한 꾸준함이 진정한 꾸준함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세 번째로 찾아간 곳은 눈이 보이지 않는 두더지가 사는 땅 속이었다. 소녀가 직접 땅을 파 들어갈 수 없었기에 두더지 굴 앞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한 참을 기다리자 굴 주변이 들썩들썩거리더니 안경을 쓴 두더지가 나타났다. ‘보이는 것도 없는데 웬 안경이람.’ 하고 생각했다. 그 순간 내 마음속의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이 두더지가 대답했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보인단다.”

소녀는 너무 놀라 민망함을 감추지 못한 채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눈이 안 보이시는데 안경을 쓴 모습이 어울리지 않는다 생각했을 뿐입니다.”

“세상엔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보다 볼 수 없는 것이 더 많단다. 지금처럼 난 눈으로 볼 수 없는 너의 마음을 보지 않았느냐.”

“제가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걸 알려는 이유는 무엇이냐?”

“또 다른 장미 밭을 일구려 합니다.”

“그래! 그렇다면 알려 주지. 난 태어날 때부터 눈이 보이질 않았단다. 자연스레 손짓 발짓을 써가며 이야기를 하는 다른 이의 말을 다 이해하기 힘들었단다. 그래서 이야기를 들을 때면 더더욱 귀를 기울였단다. 그렇게 평생을 살아오다 보니 다른 이의 숨소리만 들어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게 되더구나.”

“잘 듣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까?”

“그래, 그렇단다. 잘 듣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넌 보이는 눈이 있기에 잘 듣는다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을 것이란다. 눈을 현혹하는 것들에 속지 말고 잘 듣도록 하려무나.”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은 소녀와 같은 꽃의 요정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었다. 꽃의 요정들이 사는 마을이라 그런지 다양한 꽃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모두 이름 모를 지극히 평범한 들꽃들이었다. 유명한 꽃 하나 없는 곳에 왜 이리 많은 요정들이 모여 있는지 궁금했다. 소녀가 더 궁금했던 건 그럼에도 요정들의 표정엔 행복함이 가득했다는 것이다. 버려졌지만 소녀는 가장 아름답다는 장미에서 태어났다. 버려진 건 마음이 아팠지만 장미에서 태어났다는 자부심은 또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저들의 행복한 표정은 무엇이란 말인가? 변변한 모양도 없고 이렇다 할 색깔도 없는 들꽃에서 태어난 것이 슬프지 않단 말인가?     

 

 의아함에 그들을 한참을 바라보던 소녀의 눈에 처음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특색 없는 들꽃이지만 자신이 태어난 들꽃을 그 무엇보다도 소중히 다루는 것이었다. 특색은 없지만 들꽃의 생명력이 질긴 이유가 저 요정들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들의 부족하지만 자신을 존재하게 한 들꽃에 대한 꾸준한 마음에 더해 시야를 넓혀 준다면 어떨까? 저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 개개인만의 또 다른 가능성을 피울 수 있으면 어떨까?     

 

 순간, 소녀는 이곳이 일구려는 또 다른 장미 밭이란 생각이 들었다. 평범하지만 저들과 미래를 함께 볼 수 있다면, 그런 준비를 할 수 있다면 분명히 장미 밭을 일굴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버려진 또 하나의 공주, 버려졌기에 공주라 불릴 수 없었던 엄지는 저들과 함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우며 찬란한 장미 왕국을 꿈꾸기 시작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