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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일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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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에게 물린 적이 있다. 아랫집에 비둘기 한 마리를 잡아 뒀다고 하기에 어린 마음에 궁금해서 보러 갔다가 그 집개에게 물렸다. 너무 오래전 일이라 개에게 물리는 순간이 두려웠는지 물리고 나서 아팠는지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놀래 달려온 할머니의 ‘졸음이 쏟아져도 절대 잠들면 안 된다’는 말만 뇌리에 맴돌 뿐, 어린 나이에 개에게 물렸음에도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니 아무 일도 아니다.        

 

 

 코뼈가 부러진 적이 있다. 정확히는 으스러졌다. 친구와 드잡이를 하며 장난을 치다  모서리에 대차게 코를 박았다. 기억에 의하면 정말 대단하게 박았는데 시간이 오래 지나서 그런가? 그 순간의 아픔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박는 순간 잘못됐음을 직감했고 혼나겠구나 하는 생각이 앞섰던 기억만 난다. 보통 상처가 아니었기에 엄마가 학교로 불려 왔고 바로 병원에 갔다. 진단 결과가 보통 상황이 아님을 증명해 줬다.     

 

  왼쪽 코뼈가 완전히 으스러져 주저앉았다는 의사의 이야기를 들었다. 바로 수술에 들어갔는데 의외로 의사는 으스러진 코뼈니 그냥 들어 올리면 된다며 마취도 필요 없다고 했다. 수술이 아닌 들어 올리는 시공(?)을 시작했다. 그 순간 의사를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로 아팠다. 얼굴에 나 있는 7개의 구멍 중에 귀 빼고 5개의 구멍에서 나올 수 있는 모든 액체가 다 나 왔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도 너무 아팠다. 내 생에 가장 아팠던 고통이었다. 그래서인지 웬만한 고통은 잘 참는 편이다. 그때의 의사에게 고맙다고 해야 되는 건지 헷갈린다. 그럼에도 역시 지나고 나니 아무 일도 아니다.     

 

 

 2년간 짝사랑한 아이가 있었다. 그때 그 시절의 나의 짝사랑은 대단했다. 내 주변의 친구들과 그 아이 주변의 친구들이 다 알 정도의 짝사랑이었으니 이 정도면 이게 짝사랑인지 공개 사랑인지 정의를 다시 해야 할 정도였다.     

 

 

 오랜 시간이 지나 그 아이의 얼굴도 기억이 거의 안 나지만 그때는 그 아이만 생각했던 것 같다. 책상에도 이름을 써 놓을 정도였으니. 모든 것을 함께 하고 싶어 했던 위험한 맹목적인 사랑이었다. 어린 마음의 치기로 치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때 그 순간만큼은 진심인 사랑이었다. 기억에 유치한 시도 한 편 썼던 거 같다. 지금 읽어 보면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 시지만 유치함 속에 진심은 담겨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긴 시간의 짝사랑의 끝은 잔인하고 비참했다. 그 아이에 대한 짝사랑으로 힘들어하던 나를 위로해주던 친구 녀석이 그 아이와 손을 잡고 걸어가는 걸 목격했다. 가슴이 미어진다는 말을 이럴 때 쓰는 건가? ‘미어지다’라는 표현을 제대로 배우는 순간이었다. 그냥 포기할 수 없어 둘에게 따져 봤다. 사람의 마음을 논리로 따져 봐야 정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도 배웠다. 나에겐 억장이 무너지는 순간이지만 그들에겐 사랑이었으니 어쩌랴. 돌아서야지. 이 역시 지나고 아니 아무 일도 아니다.     

 

 

 군대를 갔다. 약동하는 봄의 생명력 같고, 찬란한 여름 태양 같으며, 귓불을 간질이는 살랑거리는 가을바람 같은,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냉철한 의지를 담고 있는 겨울의 매서움을 품은 꽃다운 나이 21살에 군대를 갔다.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근 8백 여일의 군 생활 동안 매일 밤 몸을 누이며 과연 이 시간이 갈까 하는 원망 섞인 한탄과 함께 잠들었다. 분단을 막아내지 못한 힘없는 설움을 안고 있는 모국에 대한 원망이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남자로 태어난 것에 대한 원망이었다. 하지만 전역 후 예비군도 마치고 민방위까지 마친 이 시점에 돌아보니 역시 아무 일도 아니다.     

 

 

 33살에 백수가 됐다. 참담하다고 해야 할지, 암담하다고 해야 할지, 참담과 암담의 무게를 가늠할 수 없어 두 단어가 같이 떠올랐다. 고3 시절 수능을 본 후에 아르바이트를 시작해 대학교 시절 내내 아르바이트를 했고, 이렇다 할 능력이 없음에도 운 좋게 졸업하자마자 취업이 돼 33살, 백수가 되기 전까지 계속 일을 했다. 그런데 이렇다 할 기술도 없고 특별히 전문분야의 일을 해 온 것도 아닌지라 남은 게 없었다.     

 

 

 그럼에도 스스로를 책임질 나이부터 계속 일을 해 온 나 자신에 대한 보상을 주려는 듯이 얼마 모으지도 못한 돈 그냥 써 버리며 백수 생활을 보냈다. 포기하면 편하다고 누가 그랬던가. 미래도 목표도 그냥 다 놔 버리고 백수라는 위치에 걸맞게 열심히 놀았다. 죽으란 법은 없다고 또 기회가 와 다시 일을 시작했다. 당시에 포기했던 결혼까지 하고 언감생심 꿈도 못 꾸던 예쁜 딸아이까지 키우고 있다. 역시 지나고 나니 아무 일도 아니다.     

 

 이렇게 지난 가는 일들이 얼마나 많을까? 셀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기억할 수도 없는 많은 일들이 이렇게 지나간다. 당시엔 슬프고, 아프고, 죽을 것 같지만 지나고 나면 아무 일도 아니다. 물론 아무 일도 아닌 건 아니다. 그런 일들의 기억과 기억에 묻어 있는 감정이 나를 만들어 온 것일 테니. 분명히 의미 있는 조각들일 것이다. 완성된 그릇도 내 것이요, 깨져 나간 조각도 내 것이니 뭐 하나 소중하지 않은 일들이 없을 것이다.      

 

 

 앞으로 다가 올 일들로 인해 슬플 것이고, 아플 것이고, 죽을 만큼 고통스럽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걱정은 없다. 일천한 삶의 경험이지만 겪어 보니 지나고 나면 아무 일도 아니란 걸 알 정도는 된다. 지금껏 그래 왔듯이 부딪히고 깨지고 끌어안으며 나를 만들어 가는 과정으로 삼으리라. 나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라면 반갑진 않지만 아픔조차도 쓴 약 정도는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렇다면 먹어야지, 몸에 좋은 약은 쓴 법이니. 아무리 쓴 약이라 해도 물 마시면 그만이고, 사탕 하나 빨면 아무 일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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