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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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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서운 꿈을 꾸었다. 꿈은 깨고 잠시의 시간이 지나면 대부분 생각이 나지 않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번엔 조금 달랐다. 물론 그마저도 내용이 완벽히 기억나는 건 아니었다.     

 

 

뿌옇고 희미한 느낌보다는 어두운 느낌에 조금 더 가까운 날이었다. 낮밤의 구분이 가지도 않았다. 지인들인지, 모르는 사람들인지 적지 않은 사람들과 버스를 타고 어딘가를 가고 있었다. 말 그대로 목적지를 향해간 게 아니라 그냥 가고 있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났을 무렵, 일순간 버스도 주변의 사람들도 모두 사라지고 도착했다. 그냥 도착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목적지를 향해간 게 아니니 그냥 도착한 게 맞다. 눈앞에 복도가 나타났다. 무심코 복도를 걸어가며 주변을 둘러보니 양 옆으로 문이 보였다. 그런가 보다 하고 앞으로 걸어가는데 문이 하나 열렸다. 문 안엔 아무것도 없는 어둠 그 자체였다. 의아함을 느껴 뒤로 돌아서는데 그 어둠 속에서 어떠한 존재인지 뭔지 모를 무언가가 내 물건을 스윽하고 빼앗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공포보다는 ‘어! 이거 뭐지?’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그 순간 문 안의 어둠보다도 더 어두운 손 모양의 연기가 스멀스멀 나를 잡아 흔들었다. 그 순간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공포를 느꼈다.     

 

 

 잠에서 깨어났는데 웃기지도 않게 그 손 모양은 나를 깨우는 아내의 손이었다. 순간 피식하고 웃음이 날 뻔했는데 민망해 참았다. 왜냐하면 무서운 꿈을 막 꾸고 아내가 깨워 일어난 사람이 웃는다는 게 말이 안 되는 거 같았다. 아내 말에 의하면 전혀 들어 보지 못한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무서운 꿈을 꾸긴 꾸었나 보다.     

 

 

 다음 날, 정신을 차리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냥 개꿈이다. 가위에 눌린 걸 수도 있고…. 요즘 핑계라면 핑계지만 이제 막 태어난 아이를 돌보고 있으니 몸이 말이 아니긴 하다. 그런데 그런 몸의 피곤함은 그렇게 별스럽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그럼 뭐가 불안한 건가? 꿈의 내용을 돌이켜 보면 무언 갈 대상도 모르는 존재에게 빼앗긴 꿈이다. 불안함. 그래, 그렇다. 찐득찐득하게 늘러 붙은 불안함. 그 크기가 엄청나게 커 무언 갈 해보지도 못할 만큼의 크기는 아닌 불안함. 하지만 신발 속에 들어 있는 작은 돌멩이처럼 계속 신경 쓰이는 그런 불안함. 그래서인지 오히려 큰 불안보다 떨쳐내기 더 힘든 그런 불안을 30대 초반 이후로 계속 끌어안고 살고 있다. 더 짜증 나는 건 그 크기가 크지 않아서인지 딱히 떨쳐 내고 싶은 마음도 없다는 것이다. 진흙이 가라앉아서 맑아 보이는 흙탕물에 누가 분탕질을 치지 않기만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답답한 노릇이다.     

 

 

 행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기 위해 불안을 끄집어낸 건데 늘 그렇듯이 서두가 너무 길다. 하지만 어쩌랴. 내가 이런 사람인 걸…. 장점이자 단점이라고 보기 좋게 둘러 대본다. 행복이란 무엇입니까 하고 사람들에게 물어본다면 정말 다양한 답이 나올 것이다. 지구 인구가 80억 명이라고 하니 80억 개의 답이 나올 것이다. 물론 비슷한 답들도 있겠지만 그 비슷함 속에서 분명히 디테일은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런 행복의 다양한 정의 중에 지금 내가 생각하는 행복은 외면하고 살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마냥 외면할 수 없는, 권투로 치면 잽 같은 불안을 떨쳐내는 게 아닐까 한다. 권투의 잽이 그렇다. 한 두어 대 맞으면 버틸만하지만 맞고 또 맞으면 결국 쓰러지게 된다.     

 

 

 불안은 사람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한다. 도저히 뒤가 신경 쓰여 뭘 할 수가 없다. 행복이든 불행이든 결과로써 무언 갈 받아들이려면 사람이 움직여야 되는데 도통 움직일 수가 없다. 양말을 짝짝이로 신었는데 혹여나 어디에서 신발을 벗어야 하면 어떡하지 하는 그런 불안은 겪어본 사람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조금만 무던해지면 사실 별일이 아니기도 하다. 중요한 자리가 아니라면 양말이 짝짝인 게 뭐 그리 대수겠는가? 그리고 진짜 중요한 자리를 앞두고 있다면 양말을 사서 갈아 신으면 해결되는 문제이다. 그런데 보통의 사람들은 이런 작은 불안을 외면하고 무시하고 끌어안고 산다. 나처럼 바보같이.     

 

 

 

 바보 같은 내가 불안을 떨치고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은 딱 한 가지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들의 실천 그리고 실천해낼 수 있는 용기. 이거면 충분하다. 짝짝인 양말을 드러낼 수 있는 용기, 필요하다면 비싸지도 않은 새 양말 하나 살 수 있는 용기면 충분하다. 그럼 지금까지의 삶과 현재의 삶보다도 조금은 행복해질 것 같다. 한편으론 행복을 소유라는 관점에서 생각해볼 수도 있다. 상대적이겠지만 소유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난 아직 행복하지 못한 것 같다. 물론 뭐가 없다는 의미보다는 조금 더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긴 하다. 집도, 차도 더 컸으면 좋겠고, 놀고먹으면서 아이를 키울 수 있는 재력 등…. 하지만 당장 이룰 수 없는 것들이기도 하거니와 찝찝한 불안을 용기를 바탕으로 떨쳐낸다면 그리 요원한 일도 아닐 것이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어느 깊은 가을밤, 잠에서 깨어난 제자가 울고 있었다. 그것을 본 스승이 기이하게 여겨 제자에게 물었다.

“무서운 꿈을 꾸었느냐?”

“아닙니다.”

“슬픈 꿈을 꾸었느냐?”

“아닙니다. 달콤한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어찌 그리 슬피 우는 것이냐?”

제자는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기 때문입니다.”

-영화 ‘달콤한 인생’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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