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애초에 관계에 목을 매지 마세요.
자존감을 바탕으로 혼자 서세요.
혼자 살아가라는 게 아니라 외로움을 받아들이세요.
인간은 필연적으로 외로운 존재입니다.
이걸 받아들이지 못하니
관계에 목을 매고 관계에 엮이고 고통스러워하는 겁니다.
외로움을 받아들이고 자존감을 확인할 때,
비로소 그 누구와도 자연스러운 관계를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
어떤 유튜브 영상을 보고 본인이 달아 놓은 댓글이다. 다른 글에도 인용한 적이 있는 내용이다. 초중등 시절엔 특별히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거 같고 고등학교 시절에 생각을 조금 많이 했던 거 같다.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고 이런 거다. 재미있어 보이는 친해지고 싶은 무리의 아이들과 함께 하고 싶어 하는 마음 같은 거였다. 문제는 그런 마음을 내 보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내가 스며들거나 그들이 다가오기를 바랐던 거 같다.
결과론적으론 그 무리와 친해지긴 했다. 소위 ‘찐친’까지 됐냐고 물어본다면 그 정도는 아니지만 같이 몰려다닐 정도의 친분은 쌓았고 실제로 잘 몰려다녔다.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는지 그 무리의 아이들이 다가왔는지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명확한 건 함께 하고 싶어 하는 마음을 직접적으로 내 보이진 않았던 거 같다. 친해지고 싶으면 표현하면 되는 문제였는데 치기 어린 마음에 괜히 없어 보일 거 같아 그러지 못했던 거 같다.
웃긴 건 그때 여차저차 친해진 아이들과 지금까지 인연을 이어오는 친구는 한 명도 없다. 심지어 단 한 명의 이름조자 기억나지 않는다. 친해지고 싶은 마음을 내 비치지 않고 자연스러움을 가장해 어렵게 친해진 친구들인데 웃기지도 않게 지금 내 삶 속에 그들은 없다. 함께 어울려 다니던 시절의 어렴풋한 기억 몇 조각만 남아 있을 뿐이다. 덧없다고 하는 표현이 이럴 때 쓰는 거 같다.
여하튼 그렇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친해지고 싶은 무리와 함께 하고 싶은 관계를 맺고 싶은, 하지만 자연스럽게 스며들고 싶은 그 마음은 대학교 시절에도 이어졌다. 불과 몇 년 차이지만 조금 더 컸다고 그 마음이 아주 약간은 희미해져 뭐랄까 조금은 덜 힘들었던 거 같다. 그런데 역시 대학교 시절에도 함께 하고 싶은 친구들과 친하게 지낼 수는 있었다. 무리와 함께 하면서도 몇몇 하고는 서먹했지만 크게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고등학교시절보다 조금 더 나아진 점은 그때 함께 한 친구들 중에 대학교 졸업 후에도 꽤 오래간 관계를 유지한 친구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지금은 다 뿔뿔이 흩어져 연락을 거의 안 하지만 그들과 함께 하는 카톡방도 살아있고 이름 역시 다 기억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고등학교와 대학교 시절까지의 시간 차이가 그리 크지 않은 점을 놓고 봤을 때 고등학교 시절의 그 무리보다 대학교 시절의 그 무리와 함께 한 시간이 조금 더 진솔하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 번외로 고등학교 시절에 의도하지 않은 그야말로 자연스럽게(사실 의도치 않게 싸우면서) 친해진 그야말로 찐친은 셋이 있고 아직도 함께 하고 있다. 일 년에 뜬금없이 한 두어 번을 만나도 어제까지 같이 논 것처럼 개의 새끼나 소의 새끼 등을 찾아가며 웃을 수 있는 친구들이다. 그들은 친해지고 싶다는 의도적인 마음이 아닌 자연스럽게 친해진, 언제일지 모르지만 죽는 날까지 함께 할 몇 안 되는 그야말로 친구들이다.
이 친구들을 먼저 이야기하지 않은 이유는 자연스럽지 못한 다소 맹목적인 그래서 오랜 시간이 지나 아무런 관계도 아닌 한때 친해지고 싶었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의도적인 접근에 의해 맺어진 관계이긴 하지만 사회적 이익은 전제되지 않은 관계 맺음은 대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일을 함으로 인해 친해질 수밖에 없는 사회 혹은 회사 친구를 사귀게 됐다. 이 관계의 시작은 일단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같은 회사에서 추구하는 이익 혹은 지향점이 비슷하기에 어렵지 않게 그리고 뭐랄까 같은 고생을 바탕에 둔 동지애가 더해져 관계 맺는 부분에 있어 이렇다 할 어려움은 없었다. 단, 회사를 옮기거나 하는 과정에서 하는 일이 달라지고 그로 인해 추구하는 이익 등이 달라지면 자연스럽고 빠르게 관계는 정리됐다. 어른들이 하는 말, 진짜 친구는 학창 시절에 만난 친구들이다라는 표현을 수시로 실감할 수 있었다.
그 시점부터 외로워지기 시작했다. 앞에서 이야기한 찐친들도 있었고 의도적이긴 하지만 가까워져서 연락을 주고받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외로웠다. 회사에서 맺은 관계는 오늘까지 하하 호호 웃으며 변함없이 함께 할 거 같지만 상황에 의해 순식간에 정리될 수 있었고 고등학교와 대학교 시절부터 관계를 이어오던 친구들은 나름 각자의 자리에서 바쁘게 지내다 보니 점점 내가 필요할 때 함께 할 수 없게 됐다. 더불어 나이도 어느 정도 차오르면서 속속 결혼하는 친구들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미혼의 몸으로 기혼인 친구를 불러내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닌 걸 알게 된 시점이기도 했다.
그때 사람들과의 관계 맺음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을 시작한 거 같다. 이러저러 생각과 고민 끝에 관계 맺음을 끊어 내기로 결정하게 됐다. 그럴 수 있었던 동기 혹은 이유는 생각 외로 간단했다. 고등학교 시절의 윤리 시간에 철학파트를 잘 배웠는지 나름 깊은 고민 끝에 이 한 문장이 떠올랐다. ‘인간은 어차피 혼자다.’ 이런 문장이 떠 오른 이유는 솔직히 고등학교 시절에 철학파트를 잘 배워서는 아니고 나이를 한두 살 먹어가며 30대 초반을 넘어가던 시점이었는데 모든 선택에 의한 책임을 나이가 들어 어른이라는 존재가 되면 될수록 내가 오롯이 짊어져야 하는구나를 온몸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어떤 선택을 하건 간에 그에 따른 책임은 무서울 정도로 내가 짊어져야 했다. 그 과정 속에 친구나 주변 지인들의 조언이나 걱정 혹은 응원 아니면 약간의 도움을 받을 순 있었으나 딱 거기 까지였다. 나머지 90% 이상을 철저하게 혼자 책임을 저야 했다. 그야말로 목숨을 내어 줄 정도의 관계가 아니라면 책임의 10% 안쪽 언저리까지만 관여할 수 있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을 위해 목숨을 내어 놓는 게 쉬운 일인가? 피를 섞은 가족도 쉽지 않을 일이다. 하물며 친구 혹은 지인이란 이름의 조금 친한 사이에 바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런 경험 그리고 생각을 바탕으로 아... 인간은 혼자구나... 를 받아들인 거 같았다. 그 순간 관계 맺음이 별 의미가 없구나 하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그때부터 누군가와의 관계를 맺기 위해 특별히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물론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한다고 이미 맺어진 관계가 어느 정도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 당장은 도움이 안 될 수 있어도 학창 시절부터 이어 온 나름의 관계가 있었고 일을 원만하게 하려면 직장동료와 잘 지낼 수밖에 없었다. 좋고 싫고를 떠나 먹고사는 문제가 걸려 있는데 까실락 부려 가며 일을 할 필요는 없었다. 더 이상 누군가와 친해지기 위한 노력을 굳이 애써 기울이지 않았다고 하면 정확할 거 같다.
이런 표현도 그런 생각을 굳히는 데 한몫했다. 정말 그랬는지 모르지만 삼국지에 나오는 조조가 한 표현인데 대충 이렇다. ‘세상이 나를 버리기 전에 내가 세상을 버리겠다.’ 정확하진 않다. 다소 오글거리는 표현이긴 한데 관계라는 측면으로 살짝 돌려 내 멋대로 해석을 한 거 같다. 관계 맺기를 바라는 상황이 녹록지 않아 마음이 힘들 바에야 차라리 그냥 혼자 서서 외롭고 말지 뭐 이랬던 거 같다.
특별히 믿는 종교는 없지만 불교는 학문적인 관점에서 조금 관심이 있다. 부처님이 태어나면서 일곱 걸음을 걸으며 한 유명한 말이 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하늘 위 하늘 아래 나 홀로 존귀하다.) 뒤에 다른 표현이 더 있는데 그 부분은 이 글에서 이야기할 부분은 아닌 거 같아 생략하고 보면 이 세상에 태어난 나는 그저 나 홀로 존귀할 뿐이다. 그저 나란 존재 하나면 족하다는 의미 같기도 하다. 불교신자도 아니고 관심은 있지만 깊이 배워 본 적도 없는 불교 교리를 정확하게 이해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뭐 어차피 적정선을 넘지 않는 다면 그냥 받아들이는 그대로 해석해도 그만이다.
그렇게 그 순간부터 외로움을 받아들였다. 착각하면 안 된다. 외롭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외로웠고 외로웠고 충분히 외로웠다. 30대 중반을 향해가던 덩치도 작지 않은 남자가 집에서 혼자 술을 마시며 별 다른 이유도 없이 울어 봤다면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 버틸 수 있었던 건 간간히 친구들을 만나기도 했지만 결정적으론 가족의 역할이 컸다. 가족은 괜히 가족이 아니었다. 때론 세상 제일 싫은 사람들(서로를 너무 잘 알아서 오히려 싫은...)이기도 하고, 가족인데 어쩜 저러지 싶다가도 가장 힘들 때면 역시 가족밖에 없구나 하는 생각을 뼈저리게 느낀 시기이기도 했다. 그런데 또 가족은 그냥 가족이었다. 엄마는 늘 엄마였고 동생은 늘 동생이었다. 어려울 때 그 누구보다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이미 따로 다른 삶을 살고 있는 한계는 어쩔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생각지도 않게(이미 관계 맺음에 별 관심이 없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사람을, 여자를 한 명 만나게 됐다. 별스럽지 않은 회사동료였다. 그야말로 회사동료였다. 특별할 게 없었다. 다소 작은 체구라 그랬는지 나이가 나보다 어려서 그랬는지 어느 정도 친해진 뒤에 그저 장난치기 좋은 동료 정도였다. 물론 장난이 심하거나 성적인 희롱을 섞진 않았다. 그저 잘 지내는 동료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인연이 되려고 그랬는지 일을 하면서 어려운 부분이 있으면 나에게 이거 저거 곧잘 물어봤다. 그렇다고 이 부분이 그렇게 특별한 무언가는 아니었다. 나 말고도 다른 선배들에게도 많이 물어보고 했으니까... 그럼에도 어려운 상황에 대한 질문들을 하면 귀찮은 내색 없이 대답을 잘해 줬다.(귀찮지 않았다.) 정확히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기보다는 힘들어하는 일정 주제에 대한 대화가 더 어울렸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자연스럽게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졌고 일하는 도중에 잠깐 시간이 나면 같이 아이스크림을 먹거나 저녁도 한 두어 번 먹은 거 같다. 그러던 어느 날 돌아보니 관심이 있다고 사귀자고 말하는 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여자가 친구와 대마도를 놀러 가기 전 날 만나서 그랬던 거 같다.(친구는 여자 친구였다.) 명확한 답을 듣지는 못 했다. 예정대로 친구와 대마도를 놀러 갔다 왔는데 작은 술 한 병을 선물로 사 왔다. 그리고 바로 여름휴가가 이어졌다.
놀러 가기 전에 알겠다고 대답을 한 건 아니지만 싫다고 한 것도 아니기에 대담하게 여름휴가 계획을 짰다. 그리고 밀어붙였다. 그게 2016년 8월 1일이었는데 그 여자동료는 지금 나의 아내가 됐다. 사귀고 2년이 조금 안 된 시점에 결혼을 하고 예쁜 딸아이 한 명 낳아 잘 키우며 살고 있다. 수동적으로 속해 있던 기존의 가족이 아닌 능동적으로 만들어 낸 나의 가족이다. 어쩌면 내가 속해 있던 가족보다 더 소중할 수 있는 가족이다.
물론 내가 속해 있던 가족이 덜 소중하다는 건 아니다. 다만 내가 만들어 낸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더 커서 그로 인한 소중함 역시 배가 되는 정도인 거 같다. 내가 만들어 낸 이 가족이 있다면 사회에서의 외로움도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을 거 같다. 싸울 때도 있지만 밑바닥엔 근본적인 믿음이 있어 끝을 보는 싸움이 되진 않았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란 존재가 세상에 홀로 서 있는 외로운 존재라는 사실이 변하진 않는다. 다만 그 모든 외로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해한다고 해도 부족하고 여린 사람이라 그 끝 어딘가 아스라이 자리한 외로움은 어찌할 수 없었다. 이 외로움은 타인과 관계를 맺고 안 맺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인간 존재 본연의 외로움이기 때문에 맺고 있는 관계가 많고 적음으로 해소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그럼에도 내가 만들어 낸 가족은 그 외로움을 함께 볼 수 있을 거 같긴 하다. 그래서 난 외롭지만 외롭지 않다. 확고한 두 명과의 관계가 있기 때문에 경험을 통해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연습을 하기도 했지만 타인과의 관계 맺음에 나름 초연할 수 있다. 그래서 외로운 중생 하나 거둬 준 아내와 딸이 난 제일 좋다.
우리 가족은 서로를 ‘대지’라고 부른다. 꿀꿀 그 돼지가 맞는데 돼지라는 단어를 있는 그대로 쓰면 정말 돼지 가족이 될 거 같아 약간 귀엽게 비틀어 대지라고 부른다.
엄마대지, 아기대지
아빠대지 옆에 늘 함께 있어줘서 고마워
본 포스팅은, 업체로부터 소정의 원고료를 지원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그로로 새싹단 3기. 이야기하는 늑대.
@groro.every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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